2026년 7월 21일 화요일
용서로 여는 새길
오늘의 뉴스가 보여주는 어려운 화해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먼저 받은 용서를 타인에게 베풀어 치유와 새 출발의 길을 열라는 복음의 부르심을 되새깁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오 18:22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콜로새 3:13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스포츠 뉴스 기사를 통해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한 고등학교 야구부 학생들이 다른 지역 선수들을 향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조롱하는 말을 던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말들이 상대방 선수들에게,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을지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미움과 조롱의 언어는 이처럼 사람의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깁니다.
그런데 기사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가해 학생들이 사과했고, 피해를 본 이들이 용서의 뜻을 비추었으며, 그 결과 징계가 줄어들어 다시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소식입니다. 이 과정을 보며 우리는 복음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아마 베드로는 일곱 번 정도면 충분히 관대한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모든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이 말씀은 용서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초대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에게 참으로 무겁고 어렵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깊은 상처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절로 나옵니다. 용서는 결코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거나 잘못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아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미움과 복수의 사슬에 나 자신을 묶어두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고귀한 행위입니다.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바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우리의 용서는 우리가 먼저 받은 용서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때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른 이를 용서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선물을 그저 다른 이에게 건네는 것과 같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주님의 은총 안에서 가능합니다.
오늘 기사에 등장하는 학생들은 자신들의 말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이제라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큰 상처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마음을 내어준 이들의 너그러움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용서는 한 사람의 결단으로 시작되지만, 화해는 공동체 전체의 노력으로 완성됩니다. 우리 각자가 받은 ‘화해의 직분’(2코린 5,18 참조)을 기억하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서 분열과 미움이 있는 곳에 용서와 화해의 씨앗을 심는 작은 도구가 되도록 힘쓰면 좋겠습니다. 상처받은 마음에는 주님의 위로가, 잘못을 저지른 마음에는 진정한 회개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시다.
기도
자비의 하느님 아버지, 저희가 당신께 받은 용서를 기억하며 저희에게 상처 준 이들을 용서할 용기를 주소서. 미움이 있던 자리에 당신의 사랑을, 분열이 있던 자리에 당신의 평화를 심는 화해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